한 달 생활비 110만원, 식구 8명
2019년 내가 6번째 아이를 출산했을 때 우리 식구의 생활비는 110만원이었다.
매달 받는 나의 알바비 50만원,
취학전 3명 아이 양육수당 30만원과 신생아 수당 30만원.
남편은 IT 벤처 회사를 다녔지만 월급이 안 나오기 시작했다.
적은 물질로 아이들 먼저 먹여야 해서인지, 6째 임신 때 난 거의 먹지 못했다.
임신을 했지만 체중이 줄어들어 임신성 당뇨가 되었고, 잘 먹고자 애써 임신 막달에는 겨우 1.2kg이 늘었다.
꼬박 꼬박 들어오던 남편의 월급이 없어지니 ‘이렇게 되는구나’ 깊이 절감이 되었다.
남편의 월급은 평생 나오는 것이 아니니 대책이 필요하다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는 방법이 없었다.
남편이 이직을 결심하기까지 2년 반을 버텼다.
남편은 벤처 회사 창업 멤버로서 회사를 지키기 위해 날마다 출근하였다.
나는 남편에게 전화하여 ‘집에 빨리 들어오든지, 월급을 가져오든지..’
먹히지도 않는 협박을 하였다.
우리의 사정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역 복지회에서 후원금을 받게 되면서 생활비는 월 120만원이 되었다.
정말 감사한 것은 전기세 등 공과금이 밀리지 않았고 한 번도 굶지 않았다.
오직 현금만을 사용하였다.
(돈을 아끼는 방법은 신용카드를 쓰지 않고 철저하게 현금만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식에서 신용을 사용하지 않고 현금만 사용하는 이치와 같다.)
하루는 양육수당을 받기까지 8일이 남아 있었는데, 수중에 6700원이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아이들 병원비로 써야할 수 있어 남겨 두어야했다.
8일간 단 돈 천원도 쓸 수 없을 때 정말 멘붕이 왔다.
천원만 쓸 수 있다면, 붕어빵 천원어치만 살 수 있다면...
결국 아이들 병원비를 쓸 일은 생기지 않았고, 그래서 마지막 8일째는 과자 6500원치를 사서 아이들을 먹였다.
신기하게도 가난을 겪었던 그 때가 가장 행복했다.
온 가족 모두 마음을 같이 하였고, 매일의 양식에 감사하였다.
아이들은 브랜드 옷이나 신발을 사달라고 하지 않았다.
지역사회와 교회에서 우리 가정을 많이 지원해 주고 도와주었다.
나는 남편과 돈 때문에 싸우지 않고자 애썼다.
우리는 검소하게 살면서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살아냈다.
2022년 6월, 드디어 남편은 이직을 하였다.
꽤 괜찮은 IT 중견기업에 들어갔다.
대출을 많이 받았지만 근처 단독주택을 살 수 있었다.
김정수 선생님도 식구가 많아 단독주택에서 사셨다고 하셨는데,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살림은 조금씩 펴졌다.
코로나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22년 8월 덜컥 7째를 임신하게 되었다.
하늘도 무심하다, 이미 출산율에 상당히 기여한 나인데,
또 임신이라니...코로나 베이비를 피하지 못하다니...
일을 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한 자격증도 있었는데..
아, 앞으로 똥기저귀를 또 갈아야 한다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똥기저귀 프로젝트 20년’을 준비하셨나보다...
일곱 아이들을 어떻게 건사할 것인가, 이 때부터 주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유튜브에 나오는 슈퍼개미들이 말해주는 섹터 중 들어봄직한 회사의 주식을 샀다.
배당금을 생각해서 삼성전자우도 샀다.
그렇게 40~50여 종목을 샀지만 도저히 관리를 할 수 없었다.
‘왜 안 오르지? 언제 수익이 나지? 무슨 종목을 샀지?
내가 고른 종목이 좋은 종목일까?’
마이너스 평가수익의 계좌를 보고 있는 것이 괴로워
삼성전자우를 제외하고 모두 매도해 버렸다.
23년 초, 나는 ‘김작가tv’라는 유튜브에서 선생님을 처음 보았다.
선생님을 처음 본 나의 직감은 명중했다. 그 분은 진정성이 있으셨다!!
이 후 우연히 815머티톡에서 다시 보았다.
선생님은 며느리도 안 알려 준다는 계좌관리를 알려 주셨다.
머리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의 책을 샀다.
나는 차트에 대해서 1도 몰랐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가지는 이 책 마지막을 읽을 때 내가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22년 3월, 무사히 아이를 출산하였다.
그런데 출산 4시간 후 살면서 가장 극심한 두통을 겪었다.
병원은 7째를 출산한 노산모가 용을 쓰다가 뇌출혈이 생긴 줄 알고 2번 CT를 찍었다.
나는 PCR 음성이어서 입원이 되었는데 알고 보니 코로나 잠복기였던 것이다.
PCR 음성이 아니었다면 입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니
어찌 무사히 아이를 출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랴!
하하하, 이렇게 7자녀를 둔 나는 백설공주가 되었다.
하하하, 그런데 왜 웃긴데 슬프지 ㅠㅠ
나는 7명 건사라는 사명과 함께 나의 노후를 위해 다시 주식을 생각했다.
출산 후 누워서 유투브를 보다가 선생님의 2시 라이브를 보았다.
강의 이야기를 하셨고, 선생님께 배울 수 있음에 감사하였다.
4월, 출산한지 한 달도 안 된 때 강의를 신청하였다.
처음에는 차트가 정말 어려웠다.
도저히 이 차트와 저 차트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다.
200종목 선정은 매우 더디었고, 선생님의 말씀도 어려웠다.
텔방의 고수님들 이야기는 아예 이해도 안 되었다.
꾸준히 수업을 듣고 2시 라이브를 들으면서 아주 조금씩 눈이 떠져 가기 시작했다.
먼저는 바닥을 이해하게 되었다.
바닥이 이해가 되니 앞폭탄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1주, 1만원 매매를 시작했다.
그러나 자동매도 방법을 몰라 내가 산 종목들 대부분이 앞폭탄 맞고 떨어져 버렸다.
뒤폭탄, 내리막외봉에도 수도 없이 걸려 들었다.
22년 6월 하락장으로 인해 마이너스 60, 70%도 넘게 떨어지는 종목도 부지기수였다.
절망스러웠다.
이 시간을 어찌 견디었을까?
2시 라이브 때문에 가능했다.
출석 체크 때 이름을 불러 주시고, 여러 가지 심리에 관한 말씀을 해주시고, 함께 선생님 수업을 듣는 사람들의 댓글이 큰 힘이 되었다.
게다가 이 차트와 저 차트가 구분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1만원 매매로 버는 익절금은 1천원 내외였다.
한 번에 버는 돈을 더 많이 벌고 싶어 3만원, 5만원으로 늘리다가 22년 9월경에는 10만원으로 늘렸는데, 아... 심리가 흔들렸다.
다시 1만원 매매로 돌아갔다. 다져지는 시간을 가졌다.
수업을 듣고 2시 라이브도 꼭 챙겨 들었다.
하락장에서도 10~20% 이상을 벌 수 있지만, 상승장에서는 돈을 쓸어담는다는 선생님 말씀에
닉네임을 ‘돈을 쓸어담는 여자’로 바꾸었다.
내적 갈등도 많았다.
무엇보다 나의 신앙과 대치되었다.
보수적인 기독교는 전반적으로 주식을 안 좋게 본다.
주식을 하기 전 나 또한 그러했다.
주식은 절대 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믿는 신자도 많지만
나는 십일조를 제외한 물질에 대해 자유롭게 경영하면서 쓰게 하셨다고 생각한다.
이익금의 십일조를 결심하였고 지금까지 이를 지키고 있다.
게다가 우리 선생님의 주식철학은 나의 신앙과 통하는 면이 많다.
그 중 으뜸은 ‘시장이 많이 주면 많이 먹고, 적게 주면 적게 먹고, 안 주면 안 먹는 것’이다.
나에게 통제권이 없음을 인정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은 명언이다.
최근에는 종목 당 들어가는 돈을 30만원~40만원으로 늘렸다.
지난 5월달에는 내 알바비 50만원의 2배인, 100만원을 벌었다.
언니도 내 추천으로 돈을 벌고 있어 감사하다.
나는 언니에게 많은 사랑의 빚을 진 자이기 때문이다.
나의 목표는 월천클럽 라운지 입성이다.
그 때까지 원칙을 잘 지키며 꾸준히 공부하기를 바란다.
나를 이 시대 백설공주로 만들어준 내 남편과 7자녀들..고맙습니다!
또한 김정수 선생님, 비기를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까지 잘 배우겠습니다. 건강하세요!